촉촉히 젖어 일렁이는 길을 보고 있자니 가을이 스며들었다 이파리들은 이미 생을 잃어 떠나갔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바람조차 불지 않는 고요한 곳, 조금만 더 기다리면 중년의 헤밍웨이가 인사할 법한 길이었다 새큼한 모히또 한 잔 즐기면서 저 쓸쓸하고도 활기찬 길을 함께 걷자고 나는 흔쾌히 승낙하겠지 그렇게 돌고 돌아 낙엽이 ...
1. 처음엔 푸르게 태어나 세상의 모든 검은 것들 투명하게 만들어 주리라는 큰 포부가 있었을 작은 나무는 남의 더러운 곳이나 닦아주고 있는 지금, 무슨 기분과 생각일지 2. 더럽혀진 세상을 자기 온 몸으로 받아들여 자신 하나 녹아 내리는 한이 있더라도 깨끗이 해보겠다는 큰 포부가 있었을 하얀 휴지는 남의 더러운 곳이나 닦아주고 있는 지금, 무슨 기분과 생각...
한 번은 욱신거리는 손목 탓에 파스를 붙인 적이 있었다. 붙이고 다니는 하루 종일 화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넘기었었다. 그렇게 저녁이 되고 더 이상 아무런 느낌도 느껴지지 않자 파스를 떼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파스의 역할이 끝난 느낌이었다. 깔끔하게 떼어지는 것을 보며 쾌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 느낌은 이내 아픔으로 변질되었다. 파스...
벚꽃과 목련이 함께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오늘따라 유달리 우중충했던 날씨 탓인지 오늘따라 유달리 핑그르르 돌며 떨어지던 나뭇잎 탓인지 오늘따라 유달리 층층이 쌓여있던 구름 탓인지 사실 잘은 모르겠다 분명 봄이 온 것일 터인데 공기는 어제보다 더 묵묵하고 축축했다 푸르게 함께 핀 벚꽃이, 그 옆의 붉은 열매들이 나더러 책망하는 것만 같아서 왜 나는 이런 곳...
달은 언제 돌아오나요? 길가의 가로등도, 음습한 한숨도, 너도, 나도, 아무도, 알지 못한다.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달의 기별 그저 오늘도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돌아와 주소서 한줌의 노란색을 볼 수 있게 해주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copyright .K
사람이 내뿜어낸 짙고 탁하고 축축한 그 한숨으로 하늘이 한가득 뒤덮였다 그렇게 일말의 기별도 없이 사라져 버린 달을 대신해 서 있는 길가의 가로등 비나이다 비나이다 오갈 곳 없는 불쌍한 나의 소원에 하나의 길이 되어 주소서 길과 함께 저 하늘처럼 축축하게 뒤덮인 나의 소망도 밝게 비추어 주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copyright .K
활활 불타오르다 금방 식어버렸다 나의 심장은 태엽을 돌리다 그만 죽어버렸다 더 이상의 체인은 없어 이미 내가 끊어버렸거든. 비좁고 어두운 공간 속에서 살던 나는, 빛을 보고 눈이 멀어버렸다 아아, 이 비루한 내 두 눈 모두 앗아가 주세요 쓸모없어져 버린 덩어리를 이끌고 질질 가다보니 작은 열쇠가 하나 나왔다 새로운 연결고리가 생기었다 이제 나는, 다시 돌아...
Ⅰ. 나의 씨앗 위에 터진 풍선 쪼가리가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 뗄 수 없어 얼마 전엔 사실은 이것이 내 진짜 씨앗의 모습이 아닐까 의심도 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들고 있던 검붉은 풍선의 조각이 맞다. Ⅱ. 보기 싫게 얼룩덜룩 흉측해진 내 씨앗을 가리기 위해 그 위에 페인트칠을 해 보았다 어느 누가 보아도 예쁘다 할 수 있게 새하...
/ 내 소원 오직, 대한 독립 만세 "이번 임무는 정말 중요한 거야. 절대로 발각되어서도, 붙잡혀서도 안돼. 쪽바리 놈들에게 걸리는 즉시 도망이다. 알겠나?", 대장이 말했다. 대장은 늘 옳은 말만 했기에, 그리고 나는 자신이 있었기에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늘상 같은 얘기였음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분명 대장의 지휘 ...
/정말 너를 사랑했을까. 낮이건 밤이건 상관 없었다. 내 세계는 오직 너였기에. 네가 낮이라면 낮이었고, 밤이라면 밤이었다. 그저 그랬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왜 너를 떠나는 중인걸까. 나름대로의 알찬 사랑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너에게 잠시 내 몸을 맡기며 모든 걸 떠나 보내려는 충동을 간신히 막았었다. 그 순간 만큼에 나는 너의 소유였다. 나의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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